아카세가와 겐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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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일본의 전위 예술가, 작가, 그리고 초예술 토마손과 노상관찰학의 제창자였다. 1937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2014년 사망했으며, 1960년대 네오 다다와 하이레드 센터 멤버로 활동하며 일본 전위 예술을 이끌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 『아버지가 사라졌다』, 에세이 『노인력』 등이 있으며, 만화, 사진,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모형 천 엔 지폐 사건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으며, 말년에는 토마손 관찰, 노상 관찰 학회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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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세가와 겐페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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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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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아카세가와 가쓰히코 (赤瀬川 克彦) |
다른 이름 | 오쓰지 가쓰히코 (尾辻 克彦) |
직업 | 개념 미술가 사진작가 수필가 단편 소설 작가 |
알려진 작품 | "아버지의 실종" (1981년) "유키노" (1983년) "신카이 씨의 수수께끼" (1996년) |
인물 정보 | |
출생 이름 | 아카세가와 가쓰히코 (赤瀬川 克彦) |
출생일 | 1937년 3월 27일 |
출생지 | 요코하마시, 가나가와현, 일본 |
사망일 | 2014년 10월 26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
국적 | 일본 |
가족 | 아카세가와 하야부사 (형) 아카세가와 하루코 (누나) 니시 하루히코 (종숙부) 후지무라 유카 (조카) |
예술 활동 | |
활동 시기 | 불명 |
장르 | 불명 |
주제 | 불명 |
사조 | 불명 |
대표작 | "아버지의 실종" (1981년) "유키노" (1983년) "신카이 씨의 수수께끼" (1996년) |
수상 내역 | |
수상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상 (1981년) 노마 문예 신인상 (1983년) |
2. 생애
2. 1. 초기 생애 (1937-1959)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1937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다.[7]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어린 시절 아시야, 오이타 그리고 나고야로 이사했다.[7] 1945년에는 오이타 시립 카네이케 초등학교 3학년 때 패전을 맞이했고, 아버지는 직장을 잃어 온 가족이 어머니의 부업을 도왔다. 어린 시절에는 내성적이고 소심했으며 야뇨증 버릇이 있었는데, 중학교 3학년 때 완전히 고쳤다고 한다.[57]초등학생 시절, 그림을 좋아하는 유키노 야스히로(후에 화가)와 친해졌으며, 오이타 시립 우에노가오카 중학교와 무사시노 미술학교도 동창으로 교류가 이어졌다. 5살 위의 형 아카세가와 하야토와 이소자키 아라타가 구제 중학교의 동급생이었고, 이소자키가 창립한 그림 동호회 "신세기군"에 유키노와 함께 참가하여 요시무라 마스노부를 알게 되었다.[7]
오이타현립 오이타 마이즈루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2개월 후, 가족은 나고야로 이사하여 아이치현립 아사히가오카 고등학교 미술과로 전학했다. 아라카와 슈사쿠는 나고야에서 고등학교 동창이었다.[7]
요시무라 마스노부의 권유로 무사시노 미술학교 유화과에 진학했으나, 생활비 지원이 끊겨 샌드위치맨 아르바이트로 연명했다.[7][8][9] 1956년에는 상경한 누나와 함께 살며 스나가와 기지 반대 투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1956년과 1957년에는 ''일본 앙데팡당'' 전시에 작품을 출품했다. 당시 가난했던 그는 "주변의 가난을 외면하고 순수한 예술적 이상을 추구할 수 없었다."라고 회고했다.[10] 또한 이 시기 ''일본 앙데팡당''을 지배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에 대한 좌절감을 토로하며, "실생활과 그림을 최대한 가깝게 연결하는" 무언가를 원했다고 밝혔다.[10]
2. 2. 전위 예술 활동 (1960-1970)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1950년대 후반부터 요미우리 앙데팡당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며 전위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11] 당시 앙데팡당에 출품한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그림 표면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는지 경쟁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이는 아카세가와가 기존 예술 방식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11]1960년은 아카세가와에게 전환점이 된 해였다. 대규모 안보 투쟁과 함께 요시무라 마사노부가 네오다다 오거나이저스를 창립했고, 아카세가와도 시노하라 우시오, 카자쿠라 쇼, 아라카와 슈사쿠 등과 함께 이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다.[12][13][14] 네오다다 오거나이저스는 시각 예술과 퍼포먼스 아트를 결합한 "이벤트"와 "해프닝"을 통해 예술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해체하고자 했다.[15][16] 1960년 6월 18일 안보 투쟁 중 칸바 미치코 사망 3일 후 벌인 '안보 기념 이벤트'에서는 남성 생식기 모형, 할복 의식을 연상시키는 가짜 상처 등 불쾌한 이미지를 사용했고, 아카세가와는 괴상한 의상을 입고 '''쇼추'''를 마시며 춤을 추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18]
이 시기 아카세가와는 타이어 튜브를 자르고 펼쳐서 꿰맨 '바지나 시트'(1961/1994)를 제작했다.[19] 튜브의 붉은색 내부는 여성의 신체를 연상시키며, 허브 캡을 배치하여 기묘한 조립체를 만들었다.[20] 버려진 산업 재료를 사용한 이 작품은 전후 일본 사회의 급속한 발전과 프란시스 피카비아와 마르셀 뒤샹이 탐구했던 기계적인 여성, 에로틱한 기계의 변형을 지적했다.[19]
1963년 아카세가와는 다카마츠 지로, 나카니시 나쓰유키와 함께 하이레드 센터를 결성했다.[22] 그룹 이름은 세 작가의 성 첫 글자(다카, 아카, 나카)에서 따왔다.[22] 하이레드 센터는 "직접 행동" 방식을 통해 일본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제기하고자 했다.[28]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거리를 청소하는 ''청소 이벤트''(1964)등 다양한 "이벤트"와 "해프닝"을 벌였다.[28][29]
1964년 6월 나이콰 갤러리에서 열린 ''대 파노라마 전시회''는 갤러리 문을 X자형으로 막고 "폐쇄"라는 글자를 붙여 5일 동안 닫았다가 마지막 날 "개관" 행사를 열었다.[30][31] 갤러리는 빈 캔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중에는 아카세가와의 ''통조림 우주''(1964/1994)가 있었다.[31][32] 캔 라벨을 제거하고 내벽에 붙여 "내용물"을 반전시킨 이 작품은 전체 우주를 담는다는 개념을 표현했다.[32][7]
1965년 3월, 플럭서스 멤버 쿠보타 시게코의 도움으로 하이레드 센터 활동이 도쿄 지도로 문서화되어 플럭서스 신문 5호에 게재되었다.[34]
1959년 십이지장 궤양 수술을 위해 나고야로 돌아간 아카세가와는 이세만 태풍을 겪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58] 1962년 마쓰다 마사오, 야마구치 겐지 등이 기획한 "자립학교"에 학생으로 참가했다.[60]
아카세가와는 주변 물건을 포장지로 포장하는 "포장 작품"을 제작했고, 이는 통조림 라벨을 캔 내부에 붙여 우주 전체를 포장했다고 칭하는 "우주의 통조림"으로 이어진다. 이 시기 백남준, 오노 요코 등과 교류했다.
2. 3. 천 엔 지폐 재판 (1963-1970)
1963년 5월, 아카세가와는 도쿄의 다이이치 갤러리에서 열린 하이 레드 센터의 첫 번째 갤러리 전시회인 "제5회 믹서 계획"에 초대장을 보냈다.[35][36] 이 안내장은 우편 서비스를 통해 현금 봉투에 담겨 몇몇 친한 친구들에게 전달되었으며,[37] 앞면에 단색으로 재현된 1,000엔 지폐와 뒷면에 전시회 정보가 적혀 있었다. 이후 복사된 지폐를 인쇄한 시트를 사용하여 '패키지'라는 일련의 작품을 위해 다양한 일상 물건을 포장하는 포장지로 사용했다.[38]아카세가와의 지폐는 일본 당국에 의해 급진 좌익 단체 한자이샤 도메이(범죄자 동맹) 회원들의 집을 급습하는 과정에서 처음 발견되었다.[35] 경찰은 '아카이 후센 아루이와 메소오카미 노 요루'(붉은 풍선, 또는 늑대 여자의 밤)라는 제목의 책에 실린 외설적인 사진을 수사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책에 실려 있던 아카세가와의 인쇄된 지폐를 발견했다.[35] 한자이샤 도메이가 당국에 의해 "이념적으로 부패한" 단체로 감시를 받으면서, 단체 회원들이 체포되었고, 하이 레드 센터 또한 이념적으로 부패한 단체로 낙인 찍혔다.[35] 아사히 신문은 1964년 1월 26일, 아카세가와의 사건을 일본 경제에서 유통 중인 위조 지폐인 "치-37" 사건과 연관시켜 주요 기사로 보도했다.[35]
아카세가와는 1895년 통화 및 채권 증서 모조 규제법을 위반한 지폐 모조 혐의로 기소되었다.[39] 그는 실제 위조보다 경미한 혐의인 통화 모방, 즉 "복사"('mozō')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법의 언어가 모호하여, "통화 또는 유가 증권으로 오인될 수 있는" 외관을 가진 물건의 제조 또는 판매를 금지했다.[38] 아카세가와는 "복사"('mozō')가 아니라 마치 모형 비행기를 만드는 것처럼 지폐를 "모델링"('mokei')한 것이라고 반박했다.[39] 그는 1964년 1월 도쿄 경시청에 증언을 한 직후 일본 법에 정의된 위조 개념에 대응하여 이 "모델링" 이론을 개발했다.[40]
1966년 8월, 아카세가와의 첫 번째 재판과 수많은 항소가 시작되었고, 이 모든 과정은 1970년까지 이어졌다.[38] 아카세가와는 이 모든 사건을 행위 예술이나 해프닝으로 간주하여 '모형 천 엔 지폐 사건'이라고 명명했다. 1966년 8월에 열린 '법정 전시회'에서는 35분간의 심사 동안 전시된 증거가 법정을 일종의 갤러리 공간으로 만들었으며, 이는 법정 사진작가에 의해 기록되었다.[41] 재판 과정에서 아카세가와의 친구이자 동료인 수많은 유명 예술가들이 그의 변호를 위해 증언했다. 그들은 함께 법정을 예술적 생산과 예술의 의미에 대한 논쟁의 공간으로 전유했다.[38]
이 사건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재판에서 제기된 문제와 아카세가와 변호 전략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천 엔 지폐 사건 토론 그룹을 낳았다.[43] 이 사건은 아카세가와의 모형 천 엔 지폐가 "예술"로 구성되는지, 그 예술이 자유로운 표현으로 보호되어 범죄가 아닌지 여부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다.[38] 아카세가와의 변호에서 취한 주장은 지폐의 복제가 예술 행위를 구성한다는 것이었다.[44][45] 궁극적으로, 법원은 그 지폐가 실제로 예술이라고 결정했지만, 그 예술을 제작하는 것도 범죄 행위를 구성한다고 결정했다.[46] 1967년 6월, 아카세가와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3개월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는 두 번 항소했지만, 일본 최고 재판소가 1970년에 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면서 마지막 항소를 소진했다.[47][38]
모형 천 엔 지폐 사건에 대한 유죄 판결 이후, 아카세가와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0엔 지폐를 제작하여 300엔에 교환하는 "대일본 0엔 지폐"(1967) 프로젝트였다.[48]
1963년 1월[61], "천 엔짜리 지폐의 앞면만을 한 색으로 인쇄한 것"(모형 천 엔 지폐)을 발표하고, 1963년 3월에[62] 요미우리 앙데팡당전에 "복수의 형태학"(죽이기 전에 상대를 잘 본다)을 발표했다. 히라오카 마사아키・미야하라 야스하루 등이 "범죄자 동맹"이 발행한 단행본 『붉은 풍선 혹은 암늑대의 밤』에 의해, 히라오카 등이 음란한 그림 반포로 체포되었을 때, 아카세가와의 "천 엔 지폐를 사진 촬영한 작품"이 게재되었기 때문에, 아카세가와의 작품은 경찰에 알려지게 되었다. 1965년에 "모형 천 엔 지폐"가 통화 및 증권 모조 단속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타키구치 슈조와 같은 미술계의 거물들이 변호인으로 이름을 올리며 화제가 되었다. 1967년 6월 도쿄 지방 법원의 1심에서 "징역 3개월, 집행유예 1년, 원판 몰수" 판결을 받았다. 항소 후 1970년에 집행유예가 붙은 유죄가 확정되었다.[57]
2. 4. 미학교 강사 활동 (1970-1986)
가와니 히로시가 창설한 미학교에서는 1970년부터 1986년까지 (1971년 중단) "그림・문자 공방"의 강사를 맡았다. 초기에는 마쓰다 데쓰오가 조수를 맡았으며, 이후에는 전 제자인 미나미 신보로 바뀌었다.강의 내용은 아카세가와가 그 시점에서 열중하고 있던 것들, "성냥갑 라벨 그림", 미야타케 가이코쓰, 고현학, "신문의 구인 안내", 토마손, "1엔으로 무엇을 살 수 있는가" 등이었다. 그 교실에서는 히라구치 히로미, 미나미 신보, 와타나베 가즈히로, 이즈미 하루키, 구스미 마사유키, 모리 노부유키, 우에하라 젠지, 마도노 이치야, 이노우에 노리토 등의 크리에이터가 배출되었다. 참고로, 미나미의 펜네임 "신보" 및 와타나베 가즈히로의 애칭 "나베조"는 미야타케 가이코쓰의 『활극신문』의 화가에서 유래한 것이다.
2. 5. 앵화보 (1970-1971)
1970년대부터 『아사히 저널』(아사히 신문사)이나 『월간 만화 가로』(세이린도) 등에서 만화가로 활동했다. 『아사히 저널』에 연재한 『앵화보』에서는 "앵화보야말로 신문이며, 이 주변에 있는 '잡지 형태의 것'은 앵화보의 포장지이다"라고 주장했다.[63][64] 최종회(1971년 3월 19일호)에서는 "아카이/아카이/아사히/아사히"라는 국민학교 시대의 국어 교과서의 예문을 패러디화하여, 삽화의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아사히 신문』의 로고로 그려 넣은 일러스트를 그렸다. 누드 표지와 아카세가와의 "앵화보"가 독자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해당 호는 자율 회수되었다. 이 사건으로 편집장이 해임된 것 외에 아사히 신문 출판국에서는 61명의 인사 이동이 있었고, 『아사히 저널』 자체도 2주 동안 휴간했다.[65]이후 『앵화보』의 연재는 『가로』 등에서 부활했고, 그 외에도 다양한 잡지를 "잡지 잭"했다. 또한 마쓰다 데쓰오・미나미 신보와 함께 결성한 "앵화보사"에서 "논단의 인간 관계도" 등을 발표했다.
2. 6. 문학 활동 (1979-1994)
1979년,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다나카 고헤이의 조언을 받아 '오쓰지 가쓰히코'라는 필명으로 신변 소설 「피부 감촉」을 집필하여 주오코론 신인상을 수상하고, 잡지 『주오코론』에 게재되었다.[66] 1981년에는 단편 소설 "아버지가 사라졌다"(Chichi ga kieta)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9] "전과자·전직 범죄자"에서 "아쿠타가와상 작가"로 변모하면서 주변의 대우가 크게 달라졌다고 한다. 1983년에는 「유키노」로 노마 문예 신인상을 수상했다.아카세가와는 소설 외에도 에세이와 만화를 썼으며, 특유의 유머와 스타일로 잘 알려져 있다.[7] 특히 1970년대에 제작한 만화 ''벚꽃 화보''(Sakura Gaho)가 유명하며, 이 만화는 1970년 8월부터 1971년 3월까지 주간지 ''아사히 저널''(Asahi Journal)에 처음 연재되었다.[55]
시노하라 가쓰유키의 소개로 주오코론샤의 문예 잡지 『바다』 편집자 무라마츠 도시미와 알게 되어, 미나미 신보, 이토이 시게사토 등과 함께 "무라마츠 연회"를 가졌다. 이 인연으로 무라마츠에게 "순수 문학을 써 달라"는 의뢰를 받아 『바다』에 「렌즈 아래의 쇼토쿠 태자」를 발표했지만, 너무 이론적이어서 큰 반향은 없었다.
재판 후 41세에 이혼하고 어린 딸과 부자 가정을 꾸렸는데, "딸·쿠루미코와 아버지인 나" 두 사람만이 등장하는 작품이 많아 주오코론 신인상 심사위원회에서 호모가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이 무렵 아라시야마 미쓰사부로의 소개로 후카자와 시치로와 교류하며, 후카자와의 럽미 농장에서 "아쿠타가와상 수상 축하 파티"가 열렸다.[66]
이후 순수 문학 계열의 문필 활동은 오쓰지 가쓰히코 명의로, 오쓰지·아카세가와의 "공저" 등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1994년 소설집 『라이카 동맹』을 마지막으로 오쓰지 명의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오쓰지 가쓰히코" 명의로 간행된 서적은 대부분 "아카세가와 겐페이" 명의로 변경되었지만, 일부는 여전히 오쓰지 명의로 남아있다.
1998년에는 저서 ''노인력''(Rōjin Ryoku, 노인력)이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7] 이 책에서 그는 노년기에 수반되는 신체적, 정신적 쇠퇴가 사실은 힘이 증가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7]
2. 7. 토마손과 노상 관찰 (1972-2014)
1970년 아카세가와는 비각교 미술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초예술"(hyperart)을 탐구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기묘한 도시 현상을 개념 미술적 제스처와 비유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입구로 이어지지만 현재는 제거된 계단 같은 것들이었다.[49] 이들은 후에 "토마슨"이라는 용어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과도한 연봉을 받고 도쿄 자이언츠에 영입되었지만 공을 거의 치지 못했던 야구 선수 게리 토마슨을 농담 삼아 언급한 것이다.[49] 1972년에는 미나미 신보, 마쓰다 테쓰오와 함께 요츠야를 걷던 중, 그저 올라갔다 내려오는 의미불명의 계단을 발견하고 "요츠야의 순수 계단"이라 칭했다. 아카세가와는 이를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 예술과 흡사하며 마치 모노하와 같다"고 표현했다.아카세가와는 "원자 토마슨"과 같이 맥락에서 제거된 것들의 유령 같은 흔적을 묘사하거나, 잘린 전신주에 "아베 사다 토마슨"이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등 토마슨을 분류하기도 했다.[49] "토마슨"이라는 용어는 윌리엄 깁슨과 같은 SF 작가에 의해 불법 거주자들에게 점거되어 "정크 조각"이 된 다리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49]
토마슨은 일상생활 속에서 "예술"을 발견하는 가벼운 게임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이는 레디메이드의 예술적 발전을 뒤집는 것이었다. 아카세가와는 "우리는 보통 소변기란 우리 소변을 받아 하수도로 보내는 유일한 임무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마르셀 뒤샹이 소변기를 예술적 맥락으로 가져온 제스처는 '소변기의 관리자이자 통치자로서 우리에게서 본질적인 힘을 빼앗아 그것을 자유롭게 했다.'"고 언급했다.[51] 뒤샹은 소변기를 해방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의 머리도 자유로 채웠다. 오브제라는 제목은 이러한 상호 해방의 조건하에서 탄생했다."[52]
아카세가와가 비각교에서 가르친 수업에서 토마슨 관찰 센터가 생겨났고, 그 활동은 슈퍼 사진 잡지(사진 시대)에 연재되었다.[50][49] 아카세가와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토마슨을 제출하도록 초대하며, 0엔짜리 지폐를 보상으로 약속했다.[49]
1986년 1월, 아카세가와와 그의 협력자들인 후지모리 데루노부, 미나미 신보, 마쓰다 데쓰오, 이치키 쓰토무, 하야시 조니는 예술신조 편집자 다치바나 다케시타와 만나 로조 간사쓰 갓카이(노상 관찰 학회, 줄여서 로조) 결성을 발표했다.[53] 이 그룹은 구성원들의 개별적인 친밀감을 와지로 콘과 요시다 켄키치가 저서 《고겐가쿠》(현대학)에서 만들어낸 용어인 "현대학"과 결합했다.[53] 로조는 "급속도로 현대화되는 일본 사회의 행동과 생활 환경"에 대한 콘의 문서화와 같은 "물질 문화와 일상생활에 대한 아마추어 연구자들의 일본 계보"에 위치했다.[54]
1987년, 『도쿄 노상 탐험기』는 고단샤 에세이상을 수상했다. 후년에 "노상관찰학회" 회원인 후지모리 데루노부(건축사학자・건축가, 도쿄 대학 교수)에게 자신의 집 설계를 맡겨, 지붕에 부추를 기른 "부추 하우스"를 지었다.
아카세가와는 오래된 카메라, 특히 라이카를 좋아했으며, 1992년부터 2009년까지 다카나시 유타카 및 아키야마 유타이시와 함께 사진가 그룹 라이카 도메이에 참여하여 수많은 전시회를 열었다.
2. 8. 만년 (1998-2014)
1998년의 『노인력』에서는 고령화 사회가 진행되는 가운데 "노인력"이라는 노인과 늙음에 대한 새로운 시점을 제공했다. "노인력"은 "잊는 힘"이며, "망령이 들었다"거나 "멍청해졌다"고 말하지 않고 "노인력이 붙었다"고 표현하며, 낡은 것을 "중고 미품"으로 소중히 여기는 사고방식을 제시했다. 저서 『노인력』은 쓰쿠마 쇼보 창립 이래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같은 해 말 유행어 대상에서는 최종 10개 후보에 올랐다. "노인력"이라는 말은 원래 환갑을 넘긴 아카세가와에게 후지모리 데루노부가 사용한 말이었다."노인력" 외에도 인간의 약함을 맛이라고 생각하여 "빈궁함" 연구를 통해 『초 빈궁 이야기』를 쓰고, 우유부단함에 대해서도 『우유부단술』을 썼다.
2011년에 위암으로 인한 위 전절제술을 받은 이후, 뇌출혈이나 폐렴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 중이었다.[69]
2014년 10월 25일 밤에 상태가 악화되었고[69][70], 다음 날인 10월 26일, 패혈증으로 인해 도쿄도 마치다시의 병원에서 사망했다.[71][72] 。법명은 자안원원심화평거사(慈眼院原心和平居士)[73]이며, 묘지는 키타카마쿠라의 토케이지에 있다. 2014년 말에는 추도호가 된 『아크스』 102호가 세이린코게이샤에서 간행되었다.
생전에 "과연 그랬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죽음의 순간"이라고 말했다.[57]
병상에서 요양 중에도 에세이를 집필·발표하여, 2006년 2월 2일에 창간된 전국 병원 및 조제 약국에서 무료 배포되는 의료 건강 잡지 『카라코로』 1호에 에세이 「병력(病人力)」을 게재[74], 2호(같은 해 5월 10일호)부터 『병의 창』으로 연재를 시작했다.[75]。 2013년 9월 18일호에 실린 마지막 에세이에서는[76] 절필 (유작)이 되었으며[77], 여기서 그는 "역시 인간은 웃어야 하는 존재이다."라는 문필가로서의 아카세가와의 마지막 말을 남겼다.[77]
3. 주요 작품 및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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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세가와 겐페이는 전위예술가이자 작가, 초예술 토마손(超芸術トマソン)과 노상관찰학(路上観察学)의 제창자였다.
;미술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전위예술가로서 1960년대 전위 예술 운동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1960년대에 네오 다다와 하이레드 센터의 멤버로 활동했으며, 이 시기 일본 전위 예술의 흐름을 주도했다.
1970년대 이후, 아카세가와는 미술 평론과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는 초예술 토마손(超芸術トマソン)과 노상관찰학(路上観察学)을 제창하며 일상 속 예술의 가치를 탐구했다. 요미우리 앙데팡당전(読売アンデパンダン展)에 대한 비평을 담은 저서 『반예술 앙팡』(원제: 이제 액션만이 있을 뿐!)을 출간하기도 했다.
아카세가와는 미야타케 가이코쓰(宮武外骨) 연구에도 몰두하여 관련 저서를 남겼으며, 센노 리큐(千利休)를 전위예술가로 재해석한 평전 『센노 리큐(千利休) 무언의 전위』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등에서 열린 전후 일본의 전위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하였고, 나고야 시 미술관에서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모험 뇌내 리조트 개발 대작전'(1995년)을 개최하는 등 활발한 전시 활동을 이어갔다. 치바 시 미술관에서는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예술 원론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2014년) 전시가 열리기도 했다.
;문학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는데, 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저서를 남겼다. 1970년 겐다이시초샤(現代思潮社)에서 『오브제를 가진 무산자』를 출간했고, 이후 카와데 서방 신사에서 『오브제를 가진 무산자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문장』으로 재간되었다. 1971년에는 세이린도에서 『벚꽃 화보 영구 보존판』을 출간, 이후 『벚꽃 화보 격동의 1250일 - 아카세가와 겐페이 자본주의 공화국』, 『벚꽃 화보 대전』, 신초 문고 등에서 재간되었다.
그는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꾸준히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1972년 겐다이 효론샤(現代評論社)에서 『추방된 구경꾼 사상적 변질자의 십자로』, 1985년 치쿠마 서방에서 『이제 액션만이 있을 뿐! 요미우리 앙데팡당전이라는 현상』(이후 치쿠마 문고에서 『반예술 앙팡』으로 재간), 1987년 『초예술 토마손』 (하쿠야 쇼보, 이후 치쿠마 문고), 1990년 이와나미 신서(岩波新書)에서 『센노 리큐 무언의 전위』, 1996년 분게이슌주에서 『신카이 씨의 수수께끼』(이후 문고), 1998년 치쿠마 쇼보에서 『노인력』 1-2 (『노인력 전 1권』 문고), 2000년 주오코론 신샤(中央公論新社)에서 『제로 발신』(이후 문고), 2007년 분게이슌주에서 『일본 남자』, 2011년 마이니치 신문사에서 『도쿄 수필』 등을 출간했다.
아카세가와는 다른 작가들과의 공동 작업도 활발히 했다. 1979년 쓰쓰이 야스타카, 야마시타 요스케 등과 함께 『정본 하나모게라 연구』 (고단샤)를, 1989년 데시가와라 히로시와 『시나리오 리큐』 (탄코샤)를, 1992년 미나미 신보, 네지메 쇼이치와 『이 녀석들이 일본어를 망쳤다』 (도쿄 서적, 후에 지쿠마 문고)를, 2002년 도카이린 사다오와 『가벼운 노인 모로 회의 중』 (신초샤) 및 『늙어가는 법을 잘 쓴다』 (신초샤)를, 2007년 야마시타 유지와 『실업 미술관』 (분게이슌주)을 출간했다.
오쓰지 가쓰히코(尾辻克彦)라는 필명으로도 소설을 발표했다. 1981년 분게이슌주에서 『아버지가 사라졌다 다섯 개의 단편 소설』을, 1983년 주오코론샤에서 『국기가 드리워지다』를 출간했다.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일러스트를 담당하고 오쓰지 가쓰히코 명의로 1986년 신초샤에서 『도쿄 노상 탐험기』, 1991년 주오코론샤에서 『팍팍 사전』(이후 『명쾌 팍팍 사전』 문고, 아카세가와 명의)을 출간하기도 했다.
3. 1. 미술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전위예술가로서 1960년대 전위 예술 운동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1960년대에 네오 다다와 하이레드 센터의 멤버로 활동했으며, 이 시기 일본 전위 예술의 흐름을 주도했다.1970년대 이후, 아카세가와는 미술 평론과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는 초예술 토마손(超芸術トマソン)과 노상관찰학(路上観察学)을 제창하며 일상 속 예술의 가치를 탐구했다. 요미우리 앙데팡당전(読売アンデパンダン展)에 대한 비평을 담은 저서 『반예술 앙팡』(원제: 이제 액션만이 있을 뿐!)을 출간하기도 했다.
아카세가와는 미야타케 가이코쓰(宮武外骨) 연구에도 몰두하여 관련 저서를 남겼으며, 센노 리큐(千利休)를 전위예술가로 재해석한 평전 『센노 리큐(千利休) 무언의 전위』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등에서 열린 전후 일본의 전위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하였고, 나고야 시 미술관에서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모험 뇌내 리조트 개발 대작전'(1995년)을 개최하는 등 활발한 전시 활동을 이어갔다. 치바 시 미술관에서는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예술 원론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2014년) 전시가 열리기도 했다.
3. 2. 문학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는데, 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저서를 남겼다. 1970년 겐다이시초샤(現代思潮社)에서 『오브제를 가진 무산자』를 출간했고, 이후 카와데 서방 신사에서 『오브제를 가진 무산자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문장』으로 재간되었다. 1971년에는 세이린도에서 『벚꽃 화보 영구 보존판』을 출간, 이후 『벚꽃 화보 격동의 1250일 - 아카세가와 겐페이 자본주의 공화국』, 『벚꽃 화보 대전』, 신초 문고 등에서 재간되었다.그는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꾸준히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1972년 겐다이 효론샤(現代評論社)에서 『추방된 구경꾼 사상적 변질자의 십자로』, 1985년 치쿠마 서방에서 『이제 액션만이 있을 뿐! 요미우리 앙데팡당전이라는 현상』(이후 치쿠마 문고에서 『반예술 앙팡』으로 재간), 1987년 『초예술 토마손』 (하쿠야 쇼보, 이후 치쿠마 문고), 1990년 이와나미 신서(岩波新書)에서 『센노 리큐 무언의 전위』, 1996년 분게이슌주에서 『신카이 씨의 수수께끼』(이후 문고), 1998년 치쿠마 쇼보에서 『노인력』 1-2 (『노인력 전 1권』 문고), 2000년 주오코론 신샤(中央公論新社)에서 『제로 발신』(이후 문고), 2007년 분게이슌주에서 『일본 남자』, 2011년 마이니치 신문사에서 『도쿄 수필』 등을 출간했다.
아카세가와는 다른 작가들과의 공동 작업도 활발히 했다. 1979년 쓰쓰이 야스타카, 야마시타 요스케 등과 함께 『정본 하나모게라 연구』 (고단샤)를, 1989년 데시가와라 히로시와 『시나리오 리큐』 (탄코샤)를, 1992년 미나미 신보, 네지메 쇼이치와 『이 녀석들이 일본어를 망쳤다』 (도쿄 서적, 후에 지쿠마 문고)를, 2002년 도카이린 사다오와 『가벼운 노인 모로 회의 중』 (신초샤) 및 『늙어가는 법을 잘 쓴다』 (신초샤)를, 2007년 야마시타 유지와 『실업 미술관』 (분게이슌주)을 출간했다.
오쓰지 가쓰히코(尾辻克彦)라는 필명으로도 소설을 발표했다. 1981년 분게이슌주에서 『아버지가 사라졌다 다섯 개의 단편 소설』을, 1983년 주오코론샤에서 『국기가 드리워지다』를 출간했다.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일러스트를 담당하고 오쓰지 가쓰히코 명의로 1986년 신초샤에서 『도쿄 노상 탐험기』, 1991년 주오코론샤에서 『팍팍 사전』(이후 『명쾌 팍팍 사전』 문고, 아카세가와 명의)을 출간하기도 했다.
3. 3. 만화
3. 4. 사진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사진 분야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96년에는 아키야마 유토쿠타이시, 다카나시 유타카와 함께 『라이카 동맹 NAGOYA 대사격!』을 출간했다. 1997년에는 『금속 인류학 입문』을 통해 중고 카메라의 즐거움을 소개했으며, 이후 『중고 카메라의 즐거움』으로 제목을 바꾸어 재출간되었다.2000년에는 야마시타 유지와 함께 『일본 미술 응원단』을 출간하여 일본 미술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으며, 이후 지쿠마 문고에서 재출간되었다. 2001년에는 야마시타 유지, 탄코샤와 함께 『교토, 어른의 수학여행』을 출간하고, 같은 해 아키야마 유토쿠타이시, 다카나시 유타카와 『라이카 동맹 파리 해방』을 출간했다.
2002년에는 아키야마 유토쿠타이시, 다카나시 유타카와 함께 『라이카 동맹 도쿄 고정경(칼레이도스코프)』을 출간했다. 2003년에는 야마시타 유지와 『일본 미술 응원단 어른의 사회과 견학』을 출간하고, 2004년에는 『일본 미술 관광단』을 출간했다.
2006년에는 『중고 카메라의 역습』을 통해 중고 카메라에 대한 애정을 다시 한번 드러냈으며, 2007년에는 야마시타 유지와 『실업 미술관』을 출간했다. 2016년에는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라이카도 좋지만 시계가 갖고 싶다』가 출간되었다. 2017년에는 『렌즈 아래의 쇼토쿠 태자』가 출간되었다.
3. 5. 기타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는데, 문학, 미술, 사진, 영화 등 여러 방면에서 폭넓은 저작을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오브제를 가진 무산자』, 『벚꽃 화보 영구 보존판』, 『초예술 토마손』, 『노인력』 등이 있다. 특히 『노인력』은 큰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미야타케 가이코쓰 연구에도 참여했으며, 쓰쓰이 야스타카, 야마시타 요스케 등과 함께 『정본 하나모게라 연구』를 저술하기도 했다. 아카쓰카 후지오와는 전일본 만족 문제 연구회를 결성하여 LP 레코드 『라이브 인 하토야』를 발매했고, 아카세가와는 작사를 담당했다.
1969년에는 상황극장의 공연 "소녀 도시"의 포스터를 그렸고, 1972년에는 간사이 록 밴드 집시 블러드의 앨범 "롯코 오로시"의 재킷을 디자인했다. 1984년에는 백남준과 사카모토 류이치의 비디오 작품 "올스타 비디오"의 재킷 디자인을 맡았다. 데시가와라 히로시 감독의 영화 『리큐』(1989)와 『고우히메』(1992)에서는 각본을 공동 집필했다.
4. 한국과의 관계 및 영향
5. 평가 및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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